산길, 도보./걸으며 생각하며

[퍔]국제신문의 남상범씨 걷기의 사연

선들메 2009. 5. 18. 19:00

걷기는 한편의 드라마이자 모험
대한민국 10바퀴 2만5000㎞ 걷는 '워크맨' 남상범 씨
일흔일곱 아름다운 청년 "돈 들여 바다 망치는 행정 기가 찰 노릇"


- 강철 체력의 일흔일곱 도보꾼
- 4년간 우리땅 2만 ㎞ 걸어
- 현재 8바퀴…내년 10바퀴 완보

 
"백수 명함 한 장 줄까?" 수인사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자신의 '백수 명함'부터 꺼냈다. 작은 글씨가 꽉 찬 명함은 명함보다는 전단지를 연상시킨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홍보대사'란 거창한 직함. 하지만 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게 맨 첫줄 글귀다. '나는 대한민국 10바퀴 25,000㎞를 걷는다'.

올해 일흔일곱인 남상범 씨는 도보 여행가다. 우리 국토의 맨 외곽 해안길을 두 발로 걸어서 열 바퀴를 도는 게 그의 목표다. 2005년 겨울을 시작으로, 매년 두 번씩 전국을 걸어서 일주한다. 현재 여덟 바퀴를 돌고 있다. 지난 3월 7일 서울을 출발, 서해·남해를 거쳐 동해 바닷가를 걷고 있으니, 합쳐 2만 ㎞ 조금 못 걸은 셈이다. 이번 걷기는 다음달 6일에야 끝이 난다. 희수의 나이에 배낭을 둘러메고 지구의 절반을 걷는 그에게, 걷기란 한 편의 드라마이자 삶을 통찰하는 수행일지 모른다. 날씨가 여름을 흉내내던 지난 8일, 울산 정자해변에서 경주 감포항까지 꼬박 하루를 그의 길동무가 되어 걸었다.


■길 아닌 길을 가다

아침 밥숟갈을 놓자마자 등산화 끈을 질끈 묶고 그가 길을 나섰다. 곱게 단장된 해변길을 걷는가 싶더니 철망을 가로질러 이내 바다로 빠졌다. 철망이 쳐진 걸 보면 출입제한구역임에 분명한데…. 건너편에는 해안 초소도 보인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카메라를 꺼내 풍경을 담느라 여념이 없다. 무슨 '똥배짱'일까. 경주의 읍천 해안가에선 길이 끊겨 10m 높이의 가파른 해벽을 맨손으로 짚고 올랐다. 암벽타기를 끝내니 이번엔 마을 개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요란한 '환영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남 씨의 고달픈 여정, TV 광고 한 편이 겹쳐진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그의 걷기 원칙은 철저히 '길 없는 길'을 걷는 것이다. 바다와 가장 가깝게 걷기 위해서다. 이러다 보니 툭하면 길이 끊기고 에둘러 가야 한다.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하루 40㎞ 정도 걷는다. 모래와 자갈, 암벽을 주로 걷다 보니 반듯한 도로나 흙길보다 힘이 곱절은 더 든다. 그래도 바다와 파도의 유혹은 피할 수 없다. 첫바퀴 때는 멋모르고 국도로만 걸었더니 58일 만에 일주를 마쳤다. 차츰 경험이 쌓이면서 발길은 바다로 향했고 덩달아 여정은 늘어났다. 내년 마지막 10바퀴는 열 달을 구상하고 있다. 같은 길이라도 바다를 걷는 것과 내륙을 걷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넓고 깊다고 한다.

 
  남 씨가 해변을 망치는 주범인 테트라포드(삼발이)를 가리키고 있다. 파도에 부식돼 외피가 벗겨져 있다.
까만 선글라스에 야광조끼, 등산용 반바지 그리고 태극기와 서울대학교 교기가 꽂혀 있는 배낭 등 길에서 만나는 그의 행색은 누가 봐도 눈에 띈다. 그 가운데 늘 손에 쥐고 있는 등산용 스틱의 활약이 눈부시다. 스틱은 원래 걸을 때 척추에 가해지는 충격을 덜기 위한 용도다. "하지만 팡파레 울리는 동네 개들에게 인사할 때 쓰고, 어른에게 버릇 없이 구는 놈들 혼내 줄 때도 써." 뭐니뭐니해도 도로에서 씽씽 내달리는 자동차들을 한 쪽으로 몰아 '길'을 트는 데 등산용 스틱만큼 요긴한 게 없다. "길 위에선 걷는 사람이 제일 약자고 약자가 배려 받는 건 당연하잖아." 걷기에 대한 그의 신념이다.


■걷는 고통 그리고 걷는 즐거움

일견 무모해 보이는 국토 순례는 '한 권의 책'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였다. 예순셋의 은퇴한 프랑스 기자가 4년에 걸쳐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2000㎞를 두 발로 걸으면서 겪은 여행담을 모은 책이다.

병원에서 체력지수를 재봤다. 어라, 나이 일흔에 몸은 30대란다. 타고난 강골 체력 하나만 믿고 덜컥 길을 나섰다. 그때가 2005년 12월이었다. 뼈 시린 겨울을 일주일간 쉼없이 걷고 나니 몸에 마비증세가 오더란다. 무릎을 펼 수도 발가락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숙소에 시체처럼 누웠다. '더는 걷지 못하는구나' 단념하고 아침을 맞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하룻밤 새 몸이 멀쩡하다 못해 강철로 바뀌어 버렸다. 고통이 담금질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성큼성큼' 이후 독일 병정처럼 거침없이 걷기 시작했다.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에 눈이 맵고 걷기 불편해 아예 쌍꺼풀 수술도 받았다. 10바퀴 걷기가 끝나면 그간의 이야기를 모아 그도 책을 쓸 생각이다. 매일의 사건과 사연은 일기로 정리한다.


- 부산 달맞이언덕 송림길 '축복의 길'
- 개펄 빠져 죽을 고비…동네 깡패에 쫓기기도
- 배 쫄쫄 굶고 주먹밥 먹을 땐 거지된 기분
- 길에서 만난 팬들만 1000명…후원금도 내
- 바다 끼고 걸으면 그 자체가 구원의 길

 
  감포 앞바다에서 남 씨가 휴식을 갖고 있다.뒤 편으로 문무대왕 수중릉이 보인다
'혼자 걷기'. 그의 두 번째 원칙이다. 외롭지 않을까. 자연과 바다란 불멸의 친구가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대꾸한다. 희희낙락하며 걷는 것 같아도 걷는 고통은 상상을 넘어선다고. 몸 고달픈 건 그렇다 쳐도 초반에는 머릿속에서 별별 망상들이 길 위로 다 튀어나오더란다. 한결같이 안 좋았거나 되뇌고 싶잖은 나쁜 기억의 부스러기들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세 바퀴째까지는 '길이란 법정에 선 죄인'같은 심정이었단다. 몸에서 독기가 빠져 나가듯, 네바퀴째부터 비로소 기억에서 자유로워졌다. 진짜 걷기는 이때부터였다.

그는 파도가 발끝에서 흩어지는 바닷길을 유독 고집한다. 질주하듯 산길을 걷다가도 바다만 나오면 슬로 모드로 변한다. '아~하!'란 감탄사를 입에 달고 다닌다. 바다를 걷는 것 자체가 사색이자 참회이자 신앙이라고 믿는다. 그는 장성한 아들만 다섯을 둔 아버지이자 할아버지다. 평소 무뚝뚝하던 그가 국토를 돌고 올 때마다 환해지는 표정에 가족들도 신기해하며 이젠 그의 '기행'을 지원하고 있다. 바다는 속박에서 그를 풀어 날개를 달아줬다.


■을숙도는 부산 먹여살릴 자원

"바라만 봐도 쩨쩨한 마음이 사라진다"며 바다에 유별난 애착을 보이는 남 씨. 주상절리 같은 해변가 기암괴석을 만나면 어린아이처럼 배시시 웃다가도 방파제만 보면 뒷목부터 잡는다. 특히 삼발이로 불리는 테트라포드를 두고 "국가가 돈 들여 바다를 죽이는 대표적인 경우"라며 핏대를 세웠다. 삼발이 방파제는 동해안을 거슬러 갈수록 심각하고, 2~3년 전부터 급격히 늘었다는 게 그의 관측이다. 경주 대본리 앞바다에는 삼발이를 아예 성처럼 쌓아 놓기도 했다. 규모도 문제지만 '불량품' 삼발이는 거의 흉물 수준. 파도에 시멘트 외피가 벗겨지면서 형체를 모를 만큼 깎여 나간 게 부지기수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방치되었는지 기가 찰 노릇이다. "나 같은 무지렁이 눈에도 훤히 들어오는데 전문가란 사람들은 어디서 뭘 하는지. 언론이라도 나서서 어떻게 좀 해 봐."

 
  집나가면 고생길이다. 동네 어귀에서 개들에게 쫓기고
전날 지나 왔던 온산공단의 보도블록만 해도 그렇다. "하루 온종일 사람 한 명 다닐까 말까 한 그곳에 멀쩡한 보도블록을 헐고 새 것을 까는 게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책이나 머리가 아닌 눈과 가슴, 두 다리로 바다를 지켜봤기에 부산의 해안길에 관해 물었다. 무슨 준비해 둔 원고를 낭독하듯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온다. "달맞이언덕의 송림길, 거긴 부산 사람들에겐 축복의 길이야. 암남공원도 좋고. 전국 어디에도 그런 길 없어. 을숙도는 부산을 먹여 살릴 관광자원인데, 그런 땅에 쓰레기나 묻어두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지."


■국토 걷기의 진짜 목적은 사람

점심을 먹으러 경주 읍천항의 허름한 횟집에 배낭을 풀었다. 남 씨는 회처럼 '미심쩍은' 음식은 장거리 걷기에선 멀리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뷔페 음식도 안되고 물도 꼭 끓인 물만 찾는다. 식성, 까탈스럽다. 시골 횟집에서 이것 빼고 저것 빼니 먹을 게 없다. 결국 펄펄 끓인 우럭매운탕으로 낙찰.

그와 길동무 한 지 얼추 여섯 시간이 흘렀다. 좀 친해졌다 싶어 그의 '전직'을 슬쩍 물었다. 대뜸 알려고 하지 말라며 멋쩍게 입을 닫아버린다. 그의 세 번째 걷기 원칙, '자신이 누구이며 과거 무엇을 했는지 밝히지 말 것'.

 
  길이 없어 암벽을 타거나
오지랖 넓은 그가 이 마을 저 마을 기웃거리며 주민들에게 먼저 말을 붙인다. 마을 사람들이 뭐하는 분이냐 물으면 늘상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그것도 열에 아홉은 반말투다. "나, 대한민국 걷는 사람이야." 밑도 끝도 없고, 엉뚱하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다. 이 덕에 아무 편견 없이 현지 주민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의 국토 걷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땅만 밟는 게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교감하는 게 진짜 목적이다.

"길에서 아무나 붙잡고 조곤조곤 말을 걸면 메스로 해부하듯이 그 사람의 인생이 다 나와. 특히 동네에서 한끗발 하는 사람들 있잖아, 그 사람들 사귀어 놓으면 마을 돌아가는 사정은 꿰뚫을 수 있어." 토박이도 혀를 내두루는 내밀한 마을 정보들은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수집됐다.

그렇게 길에서 인연을 맺고 지금도 연락이 닿는 이들만 1000명에 달한다. 아이 어른 가리지 않고 남녀, 빈부격차도 없다.

일일이 자신의 '백수 명함'을 건네고 상대의 인적사항을 수첩에 받아 적는다. 혼자서 '팬'들 관리가 버거워 따로 '비서'를 둘 정도다. 사람을 새로 알게 되면 매번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남상범입니다, 주소 하나 적으세요."

 
  물을 건너야 할 경우도 있다
회원은 많지 않아도 그를 응원하는 인터넷 카페도 생겼고 후원금을 내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전국을 한 바퀴 도는 데 드는 비용이 대략 1000만 원. 먹고 자고, 신발이며 옷이며 한 번 움직이고 나면 넝마가 된다. 후원금으로 그동안 7000만 원이나 걷혔다. 만 원짜리 지폐 두어 장 찔러주고 달아나는 순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0만 원을 계좌로 부치겠다는 통 큰 이도 있다. 이 날도 누가 200만 원을 부쳐 왔다. 그럴 필요없다고 극구 말려도 '독립자금 대는 심정'이라며 막무가내로 돈을 떠맡긴다. 젊은 자신들도 엄두 못낼 일을 일흔 넘은 노인네가 대신 하는 것 같아 죄스럽고 고마운 게다. 후원금 대는 사람치고 형편 번듯한 사람이 없다고 항변한다. 하긴, 허구한 날 대면하는 이들이 호젓한 포구의 촌부들 아니던가.

그렇다고 받기만 하는 건 아니다. 거동 못하는 독거노인에게 생활비를 쥐어주고 자살하려고 벼랑에 차를 대놓은 젊은 남자를 토닥거려 집에 고기라도 사들고 가라며 지갑을 내주기도 했다. 동해 쪽 절벽에 위태롭게 차를 세운 이들은 태반이 자살 기도자라고 한다.

길에서 만나고 그를 후원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정체'를 모른다. 하지만 명함에 적힌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홍보대사'란 직함, 10년 전 일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는 비상한 기억력과 해박한 지식. 여기다 의사나 의대 교수 상당수가 그의 제자인 점을 감안하면 그가 누구였고 뭘 했었는지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지난 4년간 우리땅 2만 ㎞를 걸으면서 만난 사람들이야 말로 그가 캐낸 진짜 보석들이다.


■모험 같은 방랑길

월성원자력발전소를 에둘러 구불구불한 31번 국도를 걸어 산 하나를 넘었다. 차들이 질주하는 2차선 국도. 등산용 스틱의 '놀라운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마주 오는 차량을 향해 남 씨가 스틱을 빙빙 휘두르자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생겨났다. 정확히 표현하면, 차들이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킨 것. 엉겁결에 중앙선을 넘는 차들도 있다. 어리둥절해 하는 운전자를 향해 남 씨가 손가락으로 'V'자를 날린다.

4년 동안 한 해의 절반을 길 위에서 보내는데 사건·사고가 없을 리 없다. 경험이 많지 않던 세바퀴째, 전남 영광의 갯벌을 건너다 늪처럼 몸이 빨려들었다. 가슴까지 치고 오른 뻘밭에서 죽을 힘을 다해 빠져나왔다. 뒷날 만난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거기서 살아난 게 기적"이라고 했다. 초면에 다소 거친 그의 말투 때문에 왕왕 시비도 벌어진다. "죽여버리겠다"며 횟칼을 든 동네 불량배에게 쫓긴 기억은 지금도 아찔하다. 작년 7바퀴째, 피로 누적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보름 넘게 요양소에 몸져 누웠고, 엄동설한 강원도 오지에서 잠자리와 먹을 것을 못 구해 배를 움켜쥐고 발을 동동 구른 적도 숱하다. 꾀죄죄한 몰골로 풀밭에 쪼그려 비닐에 싼 주먹밥을 우걱우걱 먹을라치면 '진짜 거지가 된 것 같아' 눈물이 주룩 떨어진다.

 
  위험을 무릎 쓰고 차도를 지나야 할 때도 많다
체력 좋고 돈이 많아도, 길에서 도움을 주는 이를 만나지 못하면 국토 걷기는 불가능한 도전임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돈도 체력도 무용지물이 되는 극한상황이 꼭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는 특히 여성의 모성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에게 물 한 모금 밥 한 끼를 내준 이들은 호탕한 남자들이 아닌 가냘픈 여성, 특히 젊은 아기 엄마들이 대부분이었다. 지금도 길에서 음식을 나눠주는 여자를 보면 스스럼없이 "엄마"라고 부른다. "먹을 거 주면 내겐 다 엄마야. 나이 그딴 거 상관없어."

생고생에도 걷기를 관둘 마음은 추호도 없다. 무슨 '똥고집'일까 싶은데 3년 전 일화를 들려준다. 구룡포에서 감포로 내려오던 길에 들른 식당에서 말싸움이 생겨 식당 주인으로부터 '소금 세례'를 받았다. 언짢고 맘이 상해 밥이고 뭐고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 사이 날은 저물고 길 위에도 칠흑의 어둠이 덮혔다. 적막한 밤하늘 아래로 달빛과 별빛이 가을비처럼 마음을 적셨다. 딱히 표현할 수 없는 감성과 영혼이 가늘게 자맥질치는 느낌이랄까. 새벽 3시 석굴암에 들러 스님들과 함께 본존불 앞에서 오체투지 큰절을 올렸다. 그는 가톨릭 신자다. 코오롱호텔에 방을 잡고 잠을 청한 게 새벽 5시30분, 정확하게 24시간 동안 80㎞를 걸었다. 걷기는 그에게 구원의 또 다른 형태다.


■그냥 걷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어둑한 해거름, 마침내 갯내 가득한 경주의 감포항에 닿았다. 이래저래 꼬박 11시간을 걸었다. 대략 30㎞. '젊은 길동무' 보폭 맞춰주느라 평소에 비해 턱없이 짧은 거리다. 온종일 땡볕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배는 등가죽에 달라붙었다.

미리 잡아둔 식당이 있는 소봉대까지는 차로 10분 거리. 택시가 잡히질 않아 애를 먹고 있는데 운좋게 횟집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가 승용차에 태워주겠다며 호의를 베풀었다. 식당으로 향하던 차 안. 남 씨가 토박이도 모르는 감포와 소봉대에 관한 비밀을 술술 풀어놓았다. 운전대를 잡은 횟집 사장의 눈이 둥그레진다. "어떻게 저보다 더 잘 아세요. 뭐하시는 분이세요?" 그렇게 그의 명단에 새로운 '열성팬' 두 명이 추가됐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기자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고, 그는 달빛이 곱다며 야간도보를 위해 차를 얻어 탔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단 한 걸음도 차량 이동은 용납하지 않는 게 그의 걷기 철칙. 헤어지는 순간까지 자신의 '전직'에 관해서는 기사화하지 말 것을 재삼재사 당부한다. 지금처럼 편견 없이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이다. 그의 뜻대로, 전화 한 통이면 풀릴 궁금증을 그대로 안고 가기로 했다.

며칠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해안의 '삼발이'가 지난해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전언과 함께 '황영일 김인규 이국현 교수'를 신문에 꼭 좀 실어달라는 주문이다. 다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들로, 그의 국토순례 첫날과 마지막 날을 함께 걷는 오래된 길벗들이다. 봄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 위로 하얀 이를 보이며 해맑게 웃던 일흔일곱의 아름다운 청년, 남상범이 떠오른다.
 
  남상범 씨의 걷기 스타일을 살펴보면 결코 갓길로 걷는 법이 없다. 언제나 차도를 당당하게 걸어간다. 차가 사람을 피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남 씨가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경주 감포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