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뒤안길/묵향 그리고 시맛

2013 신춘(시조) 당선작 (서울/경남/국제/동아/매일/영주/조선/경상/중앙/농민)

선들메 2013. 1. 12. 13:46

 

2013 신춘(시조) 당선작 (서울/경남/국제/동아/매일/영주/조선/경상/중앙/농민)

 

<서울신문>

 

번지점프 해송 현애(懸崖)/송필국

 

한 점 깃털이 되어 허공 속을 떠돌다가

치솟은 바위틈에 밀려 든 솔씨 하나

서릿발 등받이 삼아 웅크리고 잠이 든다

 

산까치 하품소리 따사로운 햇살 들어

밤이슬에 목을 축인 부엽토 후비작대며

아찔한 난간마루에 고개 삐죽 내민다

 

버거운 짐 걸머메고 넘어지다 일어서고

더러는 무릎 찧어 허옇게 아문 사리

뒤틀려 꼬인 몸뚱이 벼랑 끝에 매달린다

 

떨어질듯 되감아 오른 힘줄선 저 용틀임

눈 이불 솔잎치마 옹골찬 솔방울이

씨방 속 온기를 품어 천년 세월 버티고 있다

 

*현애: 벼랑에 붙어 뿌리보다 낮게 기우러져 자라는 나무

 

 

<경남신문>

 

백내장/김주경

 

커튼이 내려오며 연극은 끝났다

불쑥 이별을 통보받은 그날처럼

관객도 주인공도 이젠,

내 몫이 아니란다

 

함부로 탕진해 버린 시간의 얼룩들로

너무 일찍 마감된 인생의 에필로그

어둠에 갇힌 오늘이여

기다린다,

커튼 콜

 

<국제신문>

 

목수 요셉의 꿈/이양순

자욱한 시름으로 촛불을 켜는 저녁

결 따라 매긴 먹줄 말씀으로 되살아나

한 꺼풀 옹이 박힌 업죄를 벗겨가는 목수여

 

길은 어디 있는가 죄 없는 이 바라보며

성전(聖殿)의 둥근 기둥을 내리치는 손바닥엔

먼 훗날 가슴을 적실 뜨거운 피가 흐른다

 

톱밥 대팻밥에 묻어 있는 생명의 빛

고결한 숨소리가 당신 곁에 머물러

종소리 가득한 사랑이 온 누리에 퍼지고

 

품삯이야 김이 나는 식탁이면 넉넉하고

기도소리 새는 창가 성가처럼 별이 내려

거룩한 날이 열고 저무는 환한 집을 짓는다

 

<동아일보>

 

꽃씨, 날아가다/조은덕

 

바람이 날라다 준 햇살 한 줌 끌어안고

손가락 굵기만큼 동글 납작 눕히는 무

어머니, 물기 밴 시간 꼬들꼬들 말라 간다

 

짓무를라, 떼어 내고 뒤집어서 옮겨 놓는

뒤틀린 세월들을 하나 둘씩 펼쳐본다

여름이 남기고 간 속살 광주리에 가득하다

 

맵고 짠 눈물 섞어 켜켜이 눌러 담은

어둠 속에 숨 고르는 울혈의 무말랭이

주름진 생을 삭힌다, 아린 손끝 붉어온다

 

돌아가는 모퉁이길 얼비치는 맑은 아침

마른 뼈 꽉 움켜 쥔 말간 핏줄 여울목에

어머니 가벼워진 몸, 꽃씨 되어 날아간다

 

 

<매일신문>

 

새는 날개가 있다/송승원

 

당찬 야성 내려놓고 발에 익은 길을 따라

날갯짓 접어둔 채 뒤뚱거린 몸짓으로

달뜨는 도시의 하루 쪼고 있는 도도새*

 

날아 오른 시간들을 깃털 속 묻어 두고

쿵쿵 뛰는 심장소리 뉘도 몰래 사그라진

그만큼 섬이 된 무게, 어깨를 짓누른다

 

화석에 든 아이콘이 무젖어 말을 건다

푸드덕 홰를 치는 한 마리 새 나는 행간

앙가슴 풀어헤친 채 물음표를 집어 든다

 

 

<영주신문>

 

쌀점/김영순

 

해마다 봄빛 돌면 통과의례 치르듯

식구들 손 없는 날 그것도 짝수 날에

남몰래 저녁 어스름 불빛처럼 다녀간다

 

어머니는 무당을 나그네라 부른다

부엌에는 조왕신 애들 방엔 삼승 할망

달랠 신 또 하나 있네

능청스레 뜨는 달

 

“인정 걸라, 인정 걸라”

요령소리 댓잎소리

내 사랑 고백 같은 심방사설 잦아들면

놋쇠 빛 산판에 걸린 식솔들 신년 운수

 

공기 놀듯 쌀 몇 방울 휙 뿌렸다 잡아챈다

홀수는 내던지고 짝수만 받아 삼킨다

입춘이 갓 지난 봄빛

씹지 않고 삼킨다

 

<조선일보>

 

극야의 새벽/김재길

 

얼붙은 칠흑 새벽 빗발 선 별자리들

붉은 피 묻어나는 눈보라에 몸을 묻고

연착된 열차 기다리며 지평선에 잠든다.

 

황도(黃道)의 뼈를 따라 하늘길이 결빙된다

오로라 황록 꽃은 어디쯤에 피는 걸까

사람도 그 시간 속엔 낡아빠진 문명일 뿐.

 

난산하는 포유류들 사납게 울부짖고

새들의 언 날개가 분분히 부서진다

빙하가 두꺼워지다 찬 생살이 터질 때.

 

제 눈알 갉아먹으며 벌레가 눈을 뜬다

우주의 모서리를 바퀴로 굴리면서

한 줌의 빛을 들고서 연금술사가 찾아온다.

 

황천의 검은 장막 활짝 걷고 문 열어라

무저갱 깊은 바닥 쿵쿵쿵 쿵 울리면서

안맹이 번쩍 눈 뜨듯 부활하라 새벽이여.

 

*극야: 밤만 계속되는 시간을 말함. ‘백야’의 반대 현상

 

<경상일보>

 

천수만 청둥오리 / 김윤

 

지축을 뒤흔드는 수만 개 북 두드린다

오색 깃발 나부끼는 천수만 대형 스크린

지고 온 바이칼호의 눈발 털어놓는 오리 떼

 

아무르강 창공 넘어 돌아온 지친 목청

오랜 허기 채워 줄 볍씨 한 톨 아쉬운데

해 짧아 어두운 지구 먼 별빛만 성글어

 

민들레 솜털 가슴 그래도 활짝 열고

야윈 목 길게 뽑아 힘겹게 활개 치며

살얼음 찰랑 가르고 화살처럼 날아든다

<중앙일보>

 

바람의 각도/김태형

 

추위를 몰아올 땐 예각으로 날카롭게

소문을 퍼트릴 땐 둔각으로 널따랗게

또 하루 각을 잡으며

바람이 내닫는다.

 

겉멋 든 누군가의 허파를 부풀리고

치맛바람 부는 학교 허점을 들춰내며

우리의 엇각인 삶에

회초리를 치는 바람

 

골목을 깨우기 위해 어둠을 밀치는 것도

내일을 부화시키려 햇살을 당기는 것도

세상의 평각을 꿈꾸는

나직한 바람의 몫

 

 

<농민신문>

 

연어 / 김완수,

 

오년 전에 허물 벗듯 훌쩍 떠난 금실네가

가을날 지느러미 찢긴 채로 귀농했다.

세 식구 돌아온 길에 자갈들이 빽빽하다.

 

땅과 마주하는 법은 손에서 놓은 지 오래

도회의 수년 배긴 굳은살이 아른거려

금실이 아버지 눈은 흙마저도 시리다.

 

지게질도 해 보고 바닥에도 서 봤다.

시골이나 도시나 아찔하긴 매한가지

온 식구 해묵은 삶은 아가미도 헐었다.

 

댐처럼 가슴이 막혀 오는 두렁의 기억

금실네는 잃어 버린 편린들을 찾기 위해

혼탁한 모랫바닥을 퍼덕거려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