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나의 시조 합평
부산 시조시인 박홍재, 첫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발간
선들메
2018. 4. 18. 18:55
고단한 노동, 고달픈 삶…치열하고 생생한 시어들
부산 시조시인 박홍재, 첫 시조집 ‘말랑한 고집’ 발간
- 국제신문
-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
- | 입력 : 2018-04-09 18:53:49
- | 본지 22면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시인은 ‘문학 하기 쉬운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았다. 농사짓고 그 결실로 1년 사는, 대를 이은 산골 농부의 삶에서 아들을 죽자사자 교육시킬 이유는 없었지만, 책 읽기 좋아하고 공부도 곧잘 했던 시인은 고등학교까지 진학했다. 공업고등학교에서 실습하던 시절부터 옛 대우정밀에 다닌 35년간 그는 ‘기계밥’을 먹고 살았다. 그러나 성실하게 밥벌이하는 중에도 문학의 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학창 시절에도, 회사 다닐 때도 그의 여가 시간은 항상 책 아니면 시조였다. 시인이 될 사람은 시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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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집 ‘말랑한 고집’을 펴낸 시조시인 박홍재. |
2008년 ‘나래시조’를 통해 등단한 부산 시조시인 박홍재가 첫 시조집 ‘말랑한 고집’(고요아침)을 냈다. 1980년대 노동문학을 떠올리게 해서 거창하게 들리지만, 한평생 노동 현장에 있었던 그의 삶이 시의 재료가 됐으니 그에게 ‘노동 시인’이라는 수식을 붙인다 해서 그다지 어색할 건 없다.
난간 없는 층계마다 아찔함이 진을 치고/디디는 한 발 한 발 걸려드는 철골 잔해/박살 난 유리조각도 날 세우고 올려본다(‘신축 공사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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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은 신성한데, 노동자는 고단하다. 그나마 고단한 노동에서 소외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노동자의 마음은 기댈 데 없이 막막하고 서럽다.
버스 요금 천이백 원 안 쓴 것도 다행이다/막노동 일당 대신 공치고 돌아오면/탁배기 두어 통 값에 시간까지 훑어간다(‘공空 친 날’ 중)
그가 시선을 고정하는 대상은 언제나 막막한 사람, 쓸쓸한 풍경, 가난, 사소한 것, 쫓겨난 이, 늙은 사람이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 서성이는 정거장’인 요양병원을 가보고 쓴 시나 ‘단속반 눈치 치여 멍이 든 사과 하나 허리춤 쓱쓱 닦아 성근 이로 베어 무는’ 노점상 김 영감님을 관찰한 시, ‘살아온 무게만큼 흔들리는 삶의 추를 지탱하다 닳아빠진’ 구두 뒤축을 노래한 시, 그리고 ‘구겨진 지폐들이 허리 펴는 어깨 위로 누런 이 드러내 보이는 해장술에 해가 뜨는’ 새벽시장을 노래한 시가 다 그렇다. 손녀딸이 객석에서 할아버지! 부르는, 시니어 합창단의 즐거운 공연 날을 묘사한 시마저도 마음 한 구석이 애잔하다.
젖은 눈으로 주위의 안쓰러운 것들을 조용히 응시하던 시인의 마음은 고향과 가족, 부모님을 대신하는 누님에게 가 닿아서야 마음 놓고 울거나 쉰다.
고향 뜰 남새밭이 이랑이랑 담겨왔다/누님이 동생 위해 봉지마다 싸고 묶은/어머니 접힌 가슴도 살짝 묻혀 보내왔다(‘저녁 식탁에서’ 중)
365일 카메라를 들고 세상을 다니며 삶을 채집하는 시인, 모르는 것은 안 쓰는 시인, 아는 것은 치열하고 생생하게 쓰는 현장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박홍재의 시조집 ‘말랑한 고집’에서 본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