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당의 선비정신과 의병문학』에 대한 토론문 1
변종현(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16세기말 일본이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망우당은 41세로 경남 의령에서 먼저 창의하여, 조직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고, 정암진 전투를 비롯하여 진주성 전투, 창녕의 화왕산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내는데 성공하였고, 지역간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경상 우도를 방어하는데 공을 세워 왜군이 호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시킨 인물이다. 특히 임란을 당하여 이를 대처할 만한 국력도 갖추지 못하고 양병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의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망우당과 같은 재야 인재들이 의병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기에 가능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임란의 공헌으로 보아 당연히 고위관직에 나아가야 마땅하지만 창녕에 망우정을 짓고 생식을 하면서 살다간 선비이기도 하였다.
역사적 인물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인물을 신격화한다거나 영웅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망우당과 같은 인물은 역사적으로 길이 본받아야 할 선비요 문무를 겸비한 장군으로 추앙받아도 좋을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부친을 따라 국경지역인 의주에 살았고, 명나라를 다녀와 국방 문제와 국제관계에 대한 인목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망우당은 춘추를 통달하고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으며 여러 가지 시무에 관하여 두루 알고 병가의 서적을 널리 읽었다. 기개와 도량이 크고 원대하여 호걸스럽고 협기가 많으며 의(義)를 좋아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의병장으로서 난국을 타개할만한 역량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군과 접전을 할 때에도 백마를 타고 홍의를 입고 앞장 서서 적진을 헤쳐나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하여 피아장졸에게 위엄을 보이고 백마를 타고 단기로 왜군진영에 돌진함으로써 적에게 위압감을 주고 의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전법이야 말로 신화적 영웅상을 전쟁에서 몸소 구현해 보였다고 여겨진다.
망우당은 의병활동에서 용병술에서도 뛰어났지만 유가의 선비정신을 체득하고 있었고, 병가의 이론에도 깊은 지식을 갖추고 있었기에 전략과 전술을 잘 운용할 수 있었다고 논의되었다. 특히 진주, 창녕 등지의 지리적 지식을 바탕으로 유격전으로 왜군을 공격하여 적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동안 임란의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비교적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망우당의 정신세계나 의병문학에 대한 연구는 소략한 편이었다. 발표문에도 나와 있듯이 망우당은 남아있는 글이 적고 임란중에 쓴 창의문, 상소문, 실용문, 그리고 한시 몇 편이 전부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가지고 망우당의 선비정신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신 장성진 교수님께서 무척이나 고심하였던 흔적들을 발표문을 통해 알 수가 있었습니다.
발표내용을 보면서 망우당의 선비정신은 남명의 사상과 연계 시켜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논문의 핵심 부분인 “3. 문장 속의 선비 의식”을 정리하면서 이러한 면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상변(常變)의 윤리의식’이란 항목에서 망우당은 임란 이전, 임란 기간, 임란 이후의 삶의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경상감사 김수의 죄를 논죄하는 글에서 윤리에도 상변의 운용을 두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았다. 특히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 충의가 먼저임을 역설하고 행동으로 실천해야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의식 세계는 남명의 사상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요?
망우당은 16세(1567년) 때에 남명의 외손녀를 아내로 맞음으로써, 남명의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남명은 경(敬)과 의(義)를 중시하였는데, 경(敬)은 존양(存養)의 공부이고, 의(義)는 성찰(省察)의 공부이다. 송대 유학자들이 경(敬)을 중시하였다면 남명은 의(義)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남명의 ‘의(義)’를 가장 적극적으로 수용한 이가 망우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정사(正邪)의 사회의식’이란 항목에서는 초유사 김성일에게 올린 편지를 통해서 왕에 대한 충성심과 보은의 태도를 보이는 반면 왕을 향하여 통치자의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면모도 아울러 보이고 있고, 특히 동서분당이 있다는 데에 대하여 왕의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은, 망우당의 처외조부인 남명이 올린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疎)>의 내용과도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을묘사직소>는 단성현감에 제수된 남명이 사직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여기서 남명은 당시의 나라 사정을 벌레가 백 년 동안이나 목심(木心)을 갉아먹어 수액이 다 말라서 쓰러진 나무에 비유하여, 당시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자신이 나아갈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왕도의 법을 세우라고 당부 드리면서, 왕도의 법이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한다고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드렸던 것이다. 특히 감사 김수에 대한 비판을 격문에 쓰고 그것을 상소에 기록한 글과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도 두 차례나 소를 올리기도 하고, 영창대군을 구하려고 올린 소는 망우당의 선비정신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3) 춘추대의의 역사의식
망우당은 청소년기에 춘추를 읽어서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의 주제를 집약하면 의(義)라 할 수 있다. 망우당이 쓴 글에는 춘추대의의 정신이 잘 표출되어 있다. <상초유사서>, <병사시시관소>, <장준론> 등을 통하여 이러한 역사의식이 드러나는데, 특히 <장준론>을 통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망우당은 이 글을 통하여 이미 충신으로 평가된 인물인 장준이 자만심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늘 새롭게 재해석될 수 있는 데, 망우당은 장준의 정치적 행위가 문제가 있었음을 조리있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글을 통하여 망우당은 역사의식이 뚜렷하였던 것을 알 수 있고, 자신도 당대를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방향성이 뚜렷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대부들이 꿈꾸었던 부귀(富貴)와 공명(功名)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의(義)를 몸소 실천하면서 살아가고자 하였던 것 같다.
한시에 투영된 망우당의 모습은 당대 시인들과 후대 시인들이 망우당의 창의를 칭송하고 명철보신하는 지혜를 읊은 시들을 인용하였고, 가사에서는 최헌의 <용사음>과 <한양오백년가> 등에 나타난 망우당의 거의(擧義) 정신과 실제로 활약하였던 의병활동을 중심으로 노래되고 있는 모습을 제시하였다.
이 발표문에서 아쉬운 점은 망우당의 한시가 남아전하고 있는데, 이들 자료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아래에 제시한 한시에는 망우당의 선비정신과 삶의 자세가 잘 드러나있고, 특히 망우당이 신선 사상에 관심이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앞으로 홍의장군 곽재우에 대해서도 ‘이순신 장군’처럼 임란의 영웅적 인물로 서사화 되고, 영화로, 역사 드라마로, 에니메이션 등으로 제작되어 우리 역사를 지켜낸 위대한 인물로 더욱 각인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망우당의 한시 몇 편
<先輩詩帖> 坤
非賢非智又非仙 현인 지인도 아니요 또 선인도 아닌데
栖息江間絶火烟 강가에 살면서 익힌 음식 멀리하네.
後人若問成何事 후세 사람 만약에 무슨 일 했나 물으면
鎭日無憂便是仙 종일토록 걱정없으니 바로 신선이라네
<下伽倻, 가야산을 내려오며> <翰墨淸玩> 坤
山中寂寥勝塵間 산 속의 쓸쓸함이 속세보다 낫구나
靜裡乾坤合做仙 고요 속의 하늘과 땅 신선 공부 알맞구나
時危訛語驚人耳 시국 험하고 거짓 말들 귀를 어지럽히는데
回首伽倻獨悵然 가야산으로 머리 돌리니 홀로 서글프구나.
이상 두 편 데라우치 문고(경남대 박물관 소장)
詠懷 3 마음을 읊음
儒家明性理 유가는 성명을 밝히고釋氏打頑空 불가는 완악함과 공을 깨뜨리네.
不識神仙術 신선의 도술을 알지 못해도金丹頃刻成 금단이 경각에 이루어진다네.
詠懷 2 마음을 읊읆
心田無草穢 마음 밭에는 잡초가 없고性地絶塵棲 본성의 바탕에 먼지가 없다네.夜靜月明處 밤 고요하고 달 밝은 곳에一聲山鳥啼 한 소리로 산새가 울고 있네.
詠懷1 마음을 읊음
平生慕節義 평생 동안 절의를 사모하여今日類山僧 오늘에 산승처럼 되어있구나.絶粒無飢渇 곡식 끊어도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고 心空息自凝 마음을 비우니 절로 엉긴 것 풀리네.
有召命 소명이 있어
九載休糧絶鼎煙 구년 동안 양식 없이 솥에 연기 내지 않았는데 如何恩命降從天 어찌하여 은혜로운 명령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하나?安身恐負君臣義 몸을 편안히 하여 군신 의리 저버릴까 염려되는데 濟世難爲羽化仙 세상 구제함이 신선되기보다 어렵구나.
退居琵琶山 비파산에 살면서
朋友憐吾絶火煙 벗들은 익힌 음식 멀리하는 나를 측은히 여겨 共成衡宇洛江邊 함께 낙동강 변에 집을 지어주었네 無饑只在啖松葉 다만 솔잎을 씹어도 배 고프지 않고不渴惟憑飮玉泉 맑은 샘물 마셔서 목마르지 않다네
守靜彈琴心淡淡 고요하게 거문고 연주하니 마음 담담하고杜窓調息意淵淵 창문 닫고 호흡 고르니 생각은 깊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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